오늘은
제주를 떠나는 날
"옛 말에 병주고 약준다"는 말처럼
나흘간의 혹한과 강풍에 시달린 몸을 달래려는 듯
바람은 언제 불었냐고 시치미를 뚝 떼고
영하의 날씨도 따뜻한 봄날로 바뀌었다.
.
지난 날의 성난 파도는 잊어버리고
모든 회원들의 애를 태우던 비행기도 자주 보이고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확인하던 날씨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
화려한 호텔에서의 4박 5일은
꿈같이 지나가고
어제와 그제 강풍과 함께 내린 많은 눈은
한라산을 순백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고
날 오라 손짓하니 그냥 갈 수 없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발걸음 가벼웁게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1100고지"
표 달라고 주문하는 데
"1100고지" 가는 버스는 아직 통제란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교래자연휴양림"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단어
"교래자연휴양림 야영장"
눈 앞에 펼쳐진
순백의 세상
흑백으로 보아도
순백의 세상
태초의 눈내린 날이 이랬을까?
인간의 출입을 거부하고
동물들의 흔적이 전부인 세상에
달나라에 첫 발을 내딛 던
암스트롱의 심정으로
조심스레 첫 발을 디뎌봅니다.
무릎 가까이 눈이 쌓였습니다.
하얀 눈의 지붕
은근한 곡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처마끝에 흘러내린 눈
아래에서 보면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는 것 처럼
절로 입 맛을 다시게됩니다.
제주의 눈은
가지 위에 찰떡처럼 얹혀 있습니다.
일찍이 서산대사님께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湖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桯) 이라 했는데
동물의 흔적을 따라 간 오돌의 발자욱은
왜이리 어지러운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쎌카를....
칼라로 한 번 더.
야영장을 나와
휴양림으로 가는 중
아뿔싸!
순백에 홀려 정신 없이 셔터를 누르다보니
장갑이 한 쪽 뿐이다.
어디에 떨어뜨렸을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발자욱 따라가면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겠지.
유레카!
나 혼자 사는 세상에서는
물건 잃어버릴 일은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입니다.
순백의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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