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시 54

수선화에게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사진과 시 2021.04.09

시와 함께 즐기는 봄꽃

진달래꽃 하나 정연복 꽃샘추위 아직 짖궂은 심술을 부리는데 너른 산비탈 어디선가 가만히 피어 환환 웃음짖는 연분홍 진달래꽃 하나 입이 없어 한마디 말도 못해도 온몸이 작은 불꽃 되어 봄기운 출렁이는 깃발 되어 겨울의 끝이 다가왔음을 온 산에 알려준다. 개나리꽃 정연복 함께 무리지어 도도한 진노랑 빛의 물결 개나리꽃 덤불 속에 섰다 방금 전까지 슬픔에 젖어 있던 나 졸지에 희망의 한복판에 있다. 목련 정연복 목련이 지독한 생명의 몸살을 앓는 것을 며칠을 두고 몰래 지켜보았다 꽃샘추위 속 맨몸의 가지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꽃눈 틔우더니 온몸으로 온 힘으로 서서히 치밀어 올라 이윽고 꽃망울로 맺히더니 송이송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여린 생명의 고독하고 치열한 몸짓 목련은 쉽게 피는 것이 아니였구나 그래서 목..

사진과 시 2021.04.07

梅花

梅花. 王安石(1021~1086. 송나라의 재상이자 문필가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墻角數枝梅(장각수지매) : 담 모퉁이에 매화 몇 가지 凌寒獨自開(능한독자개) : 추위를 이기고 혼자 절로 피었네 遙知不是雪(요지불시설) : 멀리서도 그것이 눈이 아님을 알 수 있음은 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 그윽하게 풍겨오는 향기 때문이라네 엊그제 눈, 비 맞던 매화 오늘은 활짝 피었습니다.

사진과 시 2021.03.04

오늘은 1월 1일

1월 1일 이외수 오늘은 1월 1일 한 번도 쓰지 않는 새하얀 3백6십5일을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지급 받았습니다.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운 낱말들 소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일기장 갈피마다 파종하고 흐린 세상 비틀거리는 젊음 언젠가는 가득히 만발하는 복사꽃 찬란한 햇살 속으로 합창처럼 합창처럼 아름답게 쏟아지는 그날만 기다리겠습니다.

사진과 시 2021.01.01

산수유의 사계

지난 봄 겨울 잠에서 깨어나 시린 눈 가늘게 뜨는 산수유부터 영하의 날씨에 첫눈 아래에서 시들어가는 빨간 열매까지 사계절을 보내며 만난 산수유 방콕하며 시와 함께 즐겨봅니다. . . 산수유 조병화 도망치듯이 쫓겨나듯이 세월을 세월하는 이 세월 돌밭길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면 먼 산 중턱에 분실한 추억처럼 피어있는 산수유... 순간, 나는 그 노란 허공에 말려 나를 잃는다. 아, 이 황홀 잃어가는 세월이여! . . . 아직은 이른 봄, 바람 사나운데 찬비 내린 날 아침 노란 산수유꽃들 새앙쥐 같은 눈 뜨고 세상을 본다. -조창환님의 "산수유꽃을 보며" 중에서- 노란 산수유꽃 여기 봄이 왔다고 여기 봄이 왔다고 -고은님의 "산수유꽃" 중에서- 한여름 따사로운 햇살 아래 푸른 산수유 뭇 시인들의 관심 밖인가?..

사진과 시 2020.12.16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구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사진과 시 2020.12.14